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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필리핀과 대화를 통해서 남중국해 분쟁을해결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중국은 필리핀과 대화를 통해서 남중국해 분쟁을

해결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목  차

 

서문 1

1. 남중국해 제도는 중국 고유의 영토 4

(1) 중국의 남중국해 제도에 대한 주권은 역사적으로 확립된 것이다. 4

(2) 중국은 지속적이고 확고하게 남중국해 영토 주권과 해양 권익을 지켜왔다. 10

(3) 중국의 남중국해 주권은 국제사회로부터 널리 인정을 받았다. 16

2. 중-필 남중국해 분쟁의 원인 21

(1) 필리핀의 불법 점거 행위가 중국과 필리핀 간 난사군도 분쟁을 초래하였다. 21

(2) 필리핀의 불법 주장은 역사적 법리적 근거가 전혀 없다. 23

(3) 국제해양법의 발전이 중-필 해양경계 획정 분쟁을 초래하였다. 27

3. 남중국해 분쟁 해결은 중국과 필리핀의 공통된 인식이다. 29

(1) 대화를 통한 남중국해 분쟁 해결은 중국과 필리핀의 공통된 인식이며 약속이다. 29

(2) 남중국해 분쟁을 적절히 관리하는 것은 중-필 양국의 공통된 인식이다. 33

4. 분쟁을 복잡하게 만드는 필리핀의 행동 37

(1) 필리핀은 중국 난사군도 일부 섬과 암초에 대한 확대 점거를 꾀하고 있다. 37

(2) 필리핀은 계속해서 해상권 침해를 확대하고 있다. 40

(3) 필리핀은 중국 황옌다오(黃巖島)를 넘보고 있다. 42

(4) 필리핀의 일방적인 중재안 제소는 악의적인 행동이다. 46

5. 중국의 남중국해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 51

(1) 난사군도 영토 문제 51

(2) 남중국해 해양경계 획정 문제 52

(3) 분쟁 해결 방식에 관하여 53

(4) 남중국해에 대한 분쟁 관리 및 해상 실무 협력 전개 55

(5) 남중국해 항행 자유 및 안전에 관하여 56

(6) 남중국해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공동 노력에 관하여 57


서문

1. 남중국해는 중국 대륙의 남쪽에 위치하며 좁은 해협과 물길을 통해 동쪽으로는 태평양과 만나고 서쪽으로는 인도양과 통하는 동북, 서남 방향의 반 폐쇄형 바다이다. 남중국해 북쪽으로는 중국 대륙과 타이완(臺灣)섬이 있고 남쪽으로는 보르네오섬, 수마트라섬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필리핀 제도, 서쪽으로는 인도차이나 반도, 말레이 반도와 인접해 있다.

2. 남중국해 제도에는 둥사군도(東沙群島), 시사군도(西沙群島), 중사군도(中沙群島), 난사군도(南沙群島) 포함되며 이들 군도는 수와 크기가 일정치 않은 (島), 암초(), 사주(),모래톱()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에서도 난사군도는 섬과 암초가 가장 많고 범위가 가장 넓다.

3. 중국인들은 남중국해에서 2000여년 전부터 생활해왔다. 중국은 가장 먼저 남중국해 제도와 해역을 발견하고 명명하고 개발 이용해 왔으며, 가장 먼저 지속적이고 평화적으로 남중국해 제도와 해역에 대한 주권 및 관할권을 행사해왔다. 중국의 남중국해 제도에 대한 주권과 권익은 유구한 역사 속에서 확립된 것으로 충분한 역사적 법리적 근거를 갖는다.

4. 중국과 필리핀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긴밀히 교류하며 오랫동안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원래 영토  해양경계 획정에 관한 분쟁이 없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필리핀은 난사군도의 일부 섬과 암초를 불법으로 점거하기 시작하였고 이로 인해 중국과 필리핀 사이에 난사군도의 일부 섬과 암초에 대한 영토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밖에도 국제해양법이 발전하면서 남중국해 일부 해역에서  나라간 해양경계 획정 분쟁이 생기게 되었다. 

5. 중국과 필리핀은 아직 남중국해 분쟁 해결을 위한 어떤 협상도 진행한 적이 없다. 그러나 해상 분쟁을 타당하게 처리하기 위해 여러 차례 협상을 진행한  있으며 관련 분쟁을 대화와 협상으로 해결하자는  합의하고 양자간 문서를 통해 여러 차례 확인하였다.  나라는 2002 중국과 아세안이 공동으로 체결한 '남중국해 당사국 행동선언'(이하 '선언'으로 약칭)을 통해서 관련 분쟁을 대화와 협상으로 해결하자는 약속을 하였다.

6. 20131 필리핀공화국 당시 정부는 상기한 약속을 어기고 일방적으로 남중국해 중재안을 제소하였다. 필리핀은 원래  '유엔해양법협약'(이하 '협약'으로 약칭)의 조정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 영토 문제와, 2006 중국이 '협약'  298조에 근거, 배제성명으로 제외한 해양경계 획정 등의 문제를 왜곡 하고 포장하여 '협약' 분쟁 해결 제도를 남용하였다. 필리핀은 이로써 중국의 남중국해 영토 주권과 해양 권익의 부정을 꾀하고 있다.

7.  글은 중국과 필리핀의 분쟁에 대한 사실 관계를 밝히고 남중국해 문제에 대한 중국의 일관된 입장과 정책을 알림으로써 사실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1. 남중국해 제도는 중국 고유의 영토

(1) 중국의 남중국해 제도에 대한 주권은 역사적으로 확립된 것이다.

8. 중국인들은 예부터 남중국해 제도와 해역에서 생활하며 생산 활동에 종사해왔다. 중국은 가장 먼저 남중국해 제도와 해역을 발견하고 명명하고 개발 및 이용해왔으며, 가장 먼저 지속적이고 평화적으로 실효 지배 및 관할권을 행사하며 남중국해 제도에 대한 주권과 권익을 확립하였다.

9. 기원전 2세기, 서한(西漢)시기 중국인들을 남해를 항행하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남중국해 제도를 발견하였다.

10. 동한(東漢)이물지(異物志), 삼국시기의부남전(扶南傳)』, ()나라몽량록(夢粱錄)영외대답(岭外代答),()나라도이지략(島夷志略)』, ()나라동서양고(東西洋考)순풍상송(順風相送), ()나라지남정법(指南正法)해국문견록(海國聞見錄) 중국의 역사서는 남중국해에서 생활하던 중국인들의 모습을 기록하였을  아니라 남중국해 제도의 지리적 위치, 특징, 수문, 기상 특징 등을 기록하고 남중국해 제도의 명칭을 '창해기두(海崎頭)', '산호주(珊瑚洲)', '구유나주(九乳螺洲)', '석당(石塘)', '천리석당(千里石塘)', '만리석당(萬里石塘)', '장사(長沙)', '천리장사(千里長沙)', '만리장사(萬里長沙)' 등과 같이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11. 중국 어민들이 예로부터 남중국해를 개발 이용하는 과정에서 고정적으로 사용한 명칭 체계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섬과 사주(沙洲) '()', 암초는 '()', '()', '()', 환초(環礁) '(匡)','()','()'이라 불렀으며 해면위로 드러난 산호섬은 '사배(沙排)'등으로 불렀다. 명청() 시기에 작성된 경로부(更路簿) 중국어민들이 중국 연해지역과 남중국해 제도를 항해하던 지침서로 다양한 수사본(手抄本) 지금까지 전해진다. 여기에는 중국인의 남중국해에서의 생활과 생산 개발 활동이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 어민들이 제도에 붙인 명칭이 기재되어 있다.  중에 난사군도의 , 암초, 사주에 대한 명칭은 적어도 70곳이 넘는다. 나침반 방향에 따라서 '醜未[渚碧礁(주비자오)]', '東頭乙辛[蓬勃暗沙(펑보안사)]', 지역 특산물에 따라 '赤瓜線[赤瓜礁(츠과자오)]', '墨瓜線[礁(난빙자오)]' 명명한 곳도 있으며, 섬과 암초의 형상에 따라 '鳥串[仙娥礁(시엔어자오)]', '雙擔[信義礁(신이자오)]', 실물을 이용하여 '鍋蓋峙[安波沙洲(안보사저우)]', '秤鉤峙[景宏島(징훙다오)]' 물길에 따라서 '六門沙[六門礁(리우먼자오)]' 명명한 곳도 있다.

12. 중국인이 남중국해 제도에 붙인 이름  일부는 서양 항해자에 의해 인용되어 19~20세기 권위 있는 항행가이드나 항해지도에 표기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Namyit(鴻庥島), Sin Cowe(景宏), Subi(渚碧礁) '난이(南乙)', '청거우(秤鉤)', '처우웨이(醜未)' 하이난(海南) 방언에서 비롯되었다.

13. 많은 역사 문헌  문물 자료들이 중국인들이 남중국해 제도와 해역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이용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  이후 중국 어민들은 해마다 북동무역풍이 불면 난사(南沙)군도 해역에 가서 어업  생산활동을 하다가  다음해 남서무역풍이   중국으로 돌아왔다. 일부 어민들은 계속 섬에 머물면서 어로 활동을 하고 우물을 파서 물을 긷고 토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집과 사당을 지었으며 가축을 길렀다. 해외 사료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도 난사군도 일부 , 암초에 중국인들이 남긴 작물, 우물, , 사당, , 석각 등이 발견되었음을   있다.

14. 많은 외국 문헌 자료들이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난사군도에서 중국인들만 생산 활동을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15. 1868 출판된 영국 황실 해군문서중국해 항행지침 난사군도의 정허췬자오(和群礁, Tizard Bank and Reefs) 언급하며 "하이난(海南) 어민들은 해삼, 개각류를 채취하며 살았다.  섬마다  흔적이 있으며 오랫동안 섬에 머무는 사람도 있었다." "타이핑다오(太平, Itu Aba Island) 어민들은 다른 섬의 어민들 보다 생활이 더욱 편안하였으며 다른 섬보다 타이핑섬의 우물물이 훨씬 좋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해 항행지침1906 판본과 중국 항해지1912, 1923, 1937년의 각각 다른 판본에도 여러 곳에서 중국어민의 난사군도 생활을 언급하고 있다.

16. 19339 프랑스에서 출판된 잡지채색 식민지 세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난사군도 9 섬에 오로지 중국인(하이난인) 살고 있으며 중국인 외에 다른 나라 사람은 없다. 시난다오[西南, 즉 '난즈다오(南子島)']에는 주민 7명 중 아이가 2, 디두다오[帝都, 즉 '중예다오(中業島)']에는 주민 5, 스프래틀리섬[Spratly Island, 중국명 '난웨이다오(南威島)']에는 주민 4명으로 1930년보다 1명이 늘었으며, 뤄완다오[羅灣島, 즉 '난스다오(南鑰島)']에는 중국인이 남긴 신좌(神座), 초가집, 우물이 있다. 이투아바섬[Itu Aba Island, 중국명 '타이핑다오(太平島)]에는 사람의 흔적은 없으나 중국어 비석이 발견되었는데 대략적 의미는 '식량을 이곳에 운반했으나 사람을 찾지 못하여 철판(프랑스어 원문은 '') 아래 보관한다' 것으로 보인다. 다른 섬에는 어민들이 거주하던 흔적이 도처에 보인다. 또한 잡지는 타이핑다오, 중예다오,난웨이다오  섬에는 식물이 무성하게 우거지고 마실  있는 우물이 있으며 야자수, 바나나, 모과, 파인애플, 채소, 감자 등을 심고 가축을 길러 살기 좋은 환경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17. 1940 출판된 일본문헌폭풍의 1925 미국 해군 해도측량서(Hydrographic Office, Secretary of the Navy)에서 발행한 아시아 안내(Asiatic Pilot) 4권에도 중국어민들이   난사군도에서 생산 활동에 종사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18. 중국은 최초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남중국해 제도  해상 활동을 관리한 국가이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행정관리, 수군순찰, 자원개발, 천문측량, 지리조사를 통해 남중국해 제도와 해역을 지속적이고 평화적이고 실효적으로 관할하였다.

19. ()  중국은 광동, 광서 지역에 경략안무사(略安使) 두어 군민을 통치관할하고 남쪽 지방을 편안히 하였다. 송대 증공량(曾公亮) 군사서무경총요(經總)에서 남중국해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수군을 두고 남중국해를 순찰할 것을 언급하였다. 청대에 명의()경주부지(瓊州府誌), 종원체(鐘元棣)애주지(崖州誌)에서도 남중국해의 '석당(石塘)','장사(長沙)' 해안방어 항목에 두었다.

20. 중국의 많은 지역에서광동통지(廣東通誌), 경주부지(瓊州府誌), 『만주지(萬州誌) 같은 지방지(地方誌) 편찬하였는데, 지방지의 '국경'이나 '영토'  '산천' 항목에는 도서와 암초를 뜻하는 '천리장사(千裏長沙), 만리당석(萬裏石塘)' 또는 유사한 기록이 있다.

21. 중국의 역대 정부는 정부 공식 지도에 남중국해 제도를 중국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 황청각직성분도(各直省分圖) 천하총여도 (天下總輿圖)(1755), 대청만년일통천하도(萬年壹統天下圖)(1767), 대청만년일통지리전도(萬年壹統地理全圖)(1810) 대청일통천하전도(壹統天下全圖)(1817)  모두 남중국해 제도를 중국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

22. 역사적 사실은 중국인들이 계속 남중국해 제도와 해역을 생산과 생활의 터전으로 삼아 개발 이용해 왔음을 보여준다. 중국 역대 정부도 지속적이고 평화적이고 실효적으로 남중국해 제도를 관할해 왔다. 오랜 역사 속에서 중국은 남중국해 제도의 주권과 권익을 확립하였으며 일찍부터 중국인은 남중국해의 주인이 되었다.

(2) 중국은 지속적이고 확고하게 남중국해 영토 주권과 해양 권익을 지켜왔다.

23. 중국의 남중국해 제도에 대한 주권은 20세기 전까지 어떠한 도전도 받지 않았다.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프랑스와 일본은 무력으로 중국 난사군도의 일부 섬과 암초를 점령하였다. 이에 대해 중국 국민들은 강력히 저항하였으며 당시 중국 정부는 난사군도의 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24. 1933, 프랑스는 한차례 난사군도 일부 섬과 암초에 침입하고, 이를 '점령'하였음을 공식 발표하여 '9개섬 점령 사건' 일으켰다. 중국 각지에서 강력히 반발하며 항의하였고 프랑스의 침략행위를 비난하였다. 난사군도에 거주하는 중국 어민들도 현지에서 저항을 하였고 부홍광(符洪光), 가가유(柯家裕), 정란정(鄭蘭錠) 등은 타이핑다오, 베이즈다오, 난웨이다오, 중예다오의 프랑스 국기 게양대를 베어 넘어뜨렸다.

25. '9개섬 점령 사건' 이후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난사군도 관련 도서에는 "우리 어민들만 거주하며 국제적으로 중국 영토임을 확인하였다" 밝혔다. 중국 정부는 프랑스의 9  점령에 대하여 엄중히 교섭을 요청하였다. 또한 광둥성 정부는 프랑스가 중국 어민을 기만하여 프랑스 국기를 달도록  것에 대하여 난사군도와 해역에서 작업하는 중국 어민들이 외국 국기를 다는 것을 금하도록  지역 현장(县长)에게 통고하였다.

26. 외교부, 내정부, 해군부로 구성된 수륙지도심사위원회는 남중국해 제도의  , 암초, 사주, 모래톱의 명칭을 전문적으로 심사 결정하고 1935, 남중국해 도서도 편집 발간하였다.

27.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남중국해 제도를 불법 점거하였으며 중국인들은 일본의 침략에 용감히 저항하였다. 반파시즘전쟁과 중국 국민의 항일전쟁이 진행되면서 중국 미국 영국 3국은 194312 '카이로선언' 선포하였으며 일본은 빼앗은 영토를 중국에 돌려주어야 했다. 1945 7 중국 미국 영국 3국은 '포츠담선언' 발표하고 8 조항에 카이로 선언의 요구조건을 반드시 실행할 것을 명확히 규정하였다.

28. 19458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 받아들였다. 194611월부터 12월까지 중국 정부는 임준(林遵) 대령  고위 군관을 파견하여 '융싱(永興)', '중지엔(中建)', '타이핑(太平)', '중예()' 4대의 군함을 타고 시사군도와 난사군도로 가서 의식을 거행하고 주권비(碑)를 세우고 파병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이어서 중국 정부는 상술한 4대의 군함 이름을 따서 시사군도와 난사군도의 4 섬의 이름을 새롭게 명명하였다.

29. 19473 중국 정부는 타이핑다오에 난사군도 관리처를 세우고 광둥성에 예속시켰다. 또한 타이핑다오에 기상대와 방송국을 세우고 같은 해 6월부터 기상정보를 방송하였다.

30. 남중국해 제도에서 진행한 지리 측량을 기초로, 중국 정부는 1947 남중국해 제도 지리지략 편찬하고 '남중국해 제도 신구명칭 대조표' 심사 결정하여 남중국해 단속선을 표시한 '남중국해 제도 위치도' 제작하였다. 1948 2, 중국 정부는 '남중국해 제도 위치도' 포함한 '중화민국행정구역지도' 게시하였다.

31. 19496 중국 정부는 '하이난특구 행정장관 관공서조직 조례' 반포하고 '하이난다오', '둥사군도', '시사군도', '중사군도', '난사군도'  기타 부속서를 하이난특구에 편입시켰다.

32. 1949101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입법 행정 외교적인 방법으로 남중국해 제도에 대한 주권  관련 권익 수호 의지를 거듭 표명하였다. 중국의 남중국해 제도와 해역에 대한 순찰 활동, 자원 개발, 과학조사 등의 활동은 지금까지 잠시도 중단된 적이 없다.

33. 19518 중국 외교부장 저우언라이(周恩來) '미국 영국의 대일 평화조약 초안  샌프란시스코회의에 관한 성명' 발표하여 "시사군도와 난웨이다오는 난사군도, 중사군도 둥사군도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영토이며 일제침략 시기 한때 일본에 함락된 적이 있으나 일본 투항 이후 당시 중국 정부가 이를 모두 접수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난웨이다오  시사군도에 대한 불가침적주권은 미국 영국의 대일 평화조약 초안 규정 여부  내용에 관계 없이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 밝혔다.

34. 19589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 정부의 영해에 관한 성명' 발표하고 중국의 영해 범위를 12해리로 명확히 규정하였으며, 직선기선 방법을 채택하여 영해기선을 획정하고 상술한 규정을 '둥사군도', '시사군도', '중사군도', '난사군도'  중국에 속한 기타 도서를 포함한 모든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에 적용하였다.

35. 19593, 중국 정부는 '시사군도' '융싱다오' '시사군도, 난사군도, 중사군도 판사' 설립하였다. 19693  '판사처' '광둥성 시사군도, 중사군도, 난사군도 혁명위원회' 개칭되었다가 198110월 다시 '시사군도, 난사군도, 중사군도 판사' 명칭을 되찾았다.

36. 1983 4, 중국지명위원회는 권한을 위임 받아 총 287개의 남중국해 제도의 일부 정식 명칭을 발표하였다.

37. 19845, 6 전국인민대표대회2차 회의에서 하이난 행정구역 설정을 결정하고 관할구역 범위를 시사군도, 난사군도, 중사군도의  암초  해역으로 정하였다.

38. 19884 7 전국인민대표대회 1차 회의에서 하이난성 승격을 정하고 관할구역 범위를 시사군도, 난사군도, 중사군도의 섬, 암초  해역으로 정하였다.

39. 19922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영해  접속수역법' 반포하여 중국 영해  접속수역 기본법률을 제정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육지와 영토는 (중략) 둥사군도, 시사군도, 중사군도, 난사군도  중화인민공화국에 속한 모든 도서를 포함한다" 명확히 밝혔다. 19965, 8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19 회의에서 '유엔해양법협약' 비준을 결정하고 아울러 "중화인민공화국은 1992225 반포한 '중화인민공화국 영해  접속수역법' 2조에 명시한 군도  도서의 주권을 거듭 천명한다"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40. 19965 중국 정부는 중국연해의 산둥가오자오(高角)에서 하이난다오 쥔비자오(峻壁角) 이르는 49 영해기점과 직선으로 이어지는 영해기선, 시사군도 28 영해기점과 직선으로 이어지는 기선을 발표하고 나머지 영해기선은 따로 게시하겠다고 발표하였다.

41. 19986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배타적경제수역(EEZ) 및 대륙붕법' 반포하고 중국의 배타적경제수역과 대륙붕에 대한 기본 법률 제도를 확립하였다. 또한 " 법률 규정은 중화인민공화국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권리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분명히 규정하였다.

42. 2012 6 국무원은 하이난성 시사군도, 난사군도, 중사군도 사무처의 취소를 비준하고 2 행정구역인 산사시(三沙市) 설치하여 시사군도, 중사군도, 난사군도의  암초  해역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43. 중국은 남중국해의 생태환경  어업자원 보호를 매우 중요시한다.  1999년부터 남중국해에 여름철 휴어제도를 실시하였다. 2015 말까지 남중국해에 국가급 수생생물자연보호구 6, 성급 수생생물자연보호구 6개로 총면적269 헥타르(ha) 조성하고, 국가급 어종자원보호구 7개로 총면적128 헥타르(ha) 조성하였다.

44. 1950년대부터 중국 타이완 당국은 계속 난사군도 타이핑다오에 주둔하면서 민사복무관리기구를 설치하고 섬의 자연자원을 개발 이용하고 있다.

(3) 중국의 남중국해 주권은 국제사회로부터 널리 인정을 받았다.

45. 2차 세계대전 종식 후, 중국은 남중국해 제도를 되찾고 주권을 회복하였으며 세계적으로 많은 국가들이 남중국해 제도가 중국 영토임을 인정하였다.

46. 1951 일본과의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일본이 난사군도와 시사군도에서 모든 권리, 명분, 요구를 포기할 것을 규정하였다. 1952 일본정부는 정식으로 타이완, 펑후열도, 난사군도에 대한 일체의 권리 명분 요구를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당시 오카자키 가쓰오() 일본 외무대신이 친필 서명을 하여 추천한표준세계지도집15 지도 '동남아지도' 일본이 포기한 시사, 난사군도와 동사, 중사군도를 모두 중국의 영토로 표기하였다. 

47. 195510 마닐라에서 열린 국제민항기구(ICAO) 태평양지구 비행회의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남베트남, 중국 타이완 당국 대표가 참석하였으며 필리핀이 의장을 프랑스가 부의장을 맡았다. 회의는 24 결의를 통해 중국 타이완 당국이 난사군도에서 기상관측을 강화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이에 대해 아무도 반대나 보류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48. 195894 중국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정부의 영해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여 중국의 영해범위를 12해리로 정하고 " 규정은 둥사군도, 시사군도, 중사군도, 난사군도 및 기타 중국에 속한 도서를 포함한 모든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에 적용된다"고 명확히 밝혔다. 914 팜반동(範文同) 베트남 총리는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를 접견하여 "베트남민주공화국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1958 9 4 선포한 영해결정에 관한 성명을 인정하고 찬성"하며 "베트남민주공화국 정부는  결정을 존중한다"라고 정중히 밝혔다.

49. 19568 주타이완 미국 대표부 1등서기관 도널드 E. 웹스터(Donald E. Webster)는 미군이 황옌다오(黃巖島), 솽즈췬자오(雙子群礁), 징훙다오(景宏島), 훙시우다오(), 난웨이다오(南威島) 중사  난사군도의 섬과 암초에 가서 지형 측량을 실시할 계획이라며 중국 타이완 당국에 편의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중국 타이완 당국은 미국측의 신청을 받아들였다.

50. 196012 미국 정부는 중국 타이완 당국에 미군 군사고문관이 난사군도로 가서 솽즈췬자오, 징홍다오, 난웨이다오의 현지 측량을 진행하고자 '허가를 요청' 하였고 중국의 타이완 당국은 상술한 신청을 허가하였다.

51. 1972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 일본 정부 간 공동 성명'  일본이 '포츠담선언' 8 규정을 따를 것을 재천명하였다.

52. 프랑스 AFP보도에 따르면 1974 24 말리크(Malik) 인도네시아 외상은 "지금 발행되는 지도를 보면 '파라셀 제도 (Paracel Islands, 중국명 '시사군도') 스프래틀리 군도 (Spratly Islands, 중국명 '난사군도')  모두 중국의 영토임을   있다." 우리는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들 군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임을 뜻한다" 밝혔다.

53. 1987317일부터 41일까지 유네스코 정부간해양학위원회(IOC) 14 회의는 위원회 사무처가 제출한 '지구 해수면 관측 시스템(GLOSS) 실시계획(1985-1990)'(IOC/INF-663 REV)을 토론하였다. 보고서는 시사군도와 난사군도를 지구 해수면 관측 시스템에 편입할 것을 건의하고  개의 군도가 '중화인민공화국'에 속한다고 명문화하였다. 계획 집행을 위하여 중국 정부는 난사군도와 시사군도에  1개씩을 포함한  5개의 관측소를 설치하였다

54. 남중국해 제도가 중국의 영토라는 점은 이미 국제사회가 모두 아는 사실이다. 여러 나라에서 출판되는 백과사전, 연감, 지도에는 모두 난사군도를 중국의 것으로 표기하였다. 예를 들면, 1960 미국 월드마크출판사에서 출판된 『월드마크 각국 백과사전』, 1966 일본 극동서점(極東書店)에서 출판된 『신중국연감』, 1957, 1958, 1961 독일연방에서 출판된『세계 대지도집』, 1958 서독에서 출판된 『지구와 지리 지도집』, 1968 서독에서 출판된 『허클세계대지도집』,1954-1959  소련에서 출판된 『세계 지도집』,1957  소련에서 출판된 『외국 행정구역 구분』부도, 1959 헝가리에서 출판된 『세계 지도집』, 1974 헝가리에서 출판된 『삽화본 세계 정치 경제 지도집』, 1959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출판된 『포켓용 세계지도집』, 1977 루마니아에서 출판된 『세계지리 그림모음』, 1965 프랑스 라루스 출판사에서 출판된 『국제 정치경제 지도집』, 1969 프랑스 라루스 출판사에서 출판된 『라루스 현대지도집』, 1972년과1983 일본 平凡社에서 출판한 『세계대백과사전』부록지도와 1985 출판된 『세계대지도집』, 1980 일본 국토지리협회에서 출판된『세계와 각국』 부도 등이 있다.


2. 중-필 남중국해 분쟁의 원인

55. 중-필 남중국해 분쟁의 핵심은 필리핀이 중국 난사군도의 일부 섬과 암초를 불법으로 점거하여 생긴 영토 문제이다. 이 밖에도 국제해양법 제도의 발전으로 남중국해 일부 해역에서 중국과 필리핀의 해양경계 획정 분쟁이 생기게 되었다.

(1) 필리핀의 불법 점거 행위가 중국과 필리핀 간 난사군도 분쟁을 초래하였다.

56. 필리핀의 영토 범위는 1898년 '미국-스페인 평화조약(파리조약)', 1900년 '미국-스페인 필리핀 도서 할양조약(워싱턴조약)', 1930년 '영국령 북보르네오와 미국령 필리핀 간 경계획정에 관한 조약'을 포함한 국제조약에 의해 확정된 것이다.

57. 중국의 남중국해 제도는 필리핀 영토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 

58. 1950년대 필리핀은 중국 난사군도까지 세력 범위를 넓히려고 했다가 중국의 강력한 반대로 중단한 적이 있다. 19565 필레몬 클로마(Filemon Cloma) 선장은 개인탐험대를 조직하여 난사군도에 와서 중국 난사군도의 일부 섬을 마음대로 '자유의 '이라 불렀다. 이어서 카를로스 폴레스티코 가르시아(Carlos Polestico Garcia) 필리핀 부총리겸 외무상은 클로마의 행동에 지지의 뜻을 밝혔다. 이에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529 성명을 발표하여 "난사군도는 본래부터 중국 영토의 일부분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들 도서에 대하여 의문의 여지가 없는 합법적 주권을 갖는다. (중략)  어떤 국가도  어떠한 구실과 방법으로 이를 침범하는 것을 용납할  없다"고 엄중히 항의하였다. 아울러 중국 타이완 당국은 난사군도에 군함을 파견하여 해역을 순시하고 난사군도 타이핑다오 주둔을 재기하였다.  , 필리핀  사건은 클로마의 개인적인 행동으로 필리핀 정부와 무관하다고 표명했다.

59. 1970년대부터 필리핀은 중국의 난사군도의 일부 섬과 암초를 무력 점거하고 불법적인 영토 주장을 제기하였다.  19708월과 9 필리핀은 마환다오(馬歡島) 페이신다오() 불법 점거하였다. 19714 필리핀은 난스다오(南鑰島) 중예다오(業島) 불법 점거하였다. 19717 필리핀은 시웨다오(西月) 베이즈다오(北子) 불법 점거하였다. 19783월과 19807 필리핀은 솽황사저우(雙黃沙洲) 스링자오(司令礁) 불법 점거하였다. 19786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은 1596 대통령령에 서명하여 중국 난사군도 일부 섬과 산호초 주변의 넓은 해역을 '카라얀군도' (카라얀은 필리핀 타갈로그어로 '자유' 뜻함)라고 명명하고 행정구역 '카라야진구' 설정하여 불법으로 이곳을 필리핀 영토 범위에 편입하였다.

60. 필리핀은 또한 국내 입법 절차를 통해서 자국의 영해, 배타적경제수역, 대륙붕 주장을 제기하였다.   일부는 중국의 남중국해 해양 권익과 충돌이 생긴다.

61. 필리핀은 중국 난사군도의 섬과 암초에 대한 불법 점거 사실과 영토 확장 야심을 숨기기 위해서 "'카라얀군도' 난사군도에 속하지 않으며 '무주지(無主地)'이다", "난사군도는 2 세계대전 이후의 '신탁통치' 지역이다", "필리핀이 난사군도를 점거한 것은 '지리적 근접성' '국가 안보' 때문이다", "난사군도 일부 섬과 암초는 필리핀 배타적경제수역(EEZ) 대륙붕 내에 있다", "필리핀이 관련 섬과 암초를 '실효 지배'하고 있는 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다" 등과 같은 구실들을 꾸며내고 있다.

(2) 필리핀의 불법 주장은 역사적 법리적 근거가 전혀 없다.

62. 역사와 국제법으로 볼 때 필리핀의 난사군도 일부 섬과 암초에 대한 영토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63. 첫째, 난사군도는 필리핀 영토의 일부분이었던 적이 없다. 필리핀의 영토범위는 이미 국제협약에 의해 확정되었다. 이에 대해 당시 필리핀을 통치하였던 미국은 명확히 알고 있다. 1933812 Isbelo de los Reyes필리핀 미국령 상원의원 프랭크 머피(Frank Murphy) 주필리핀 미국 총독 에게 서신을 보내 지리적 근접성을 이유로 일부 난사군도가 필리핀 군도의 일부라고 주장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관련 서신은 미국 육군 부대와 국무원에 전달되어 처리되었다. 1933109 미국 국무장관은 답신을 통해 " 도서는 (중략) 1898 스페인으로부터 받은 필리핀 군도의 경계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였다. 19355, 미국 육군장관은 코델  국무장관에게 서신을 보내 국무원이 필리핀의 난사군도 영토주장이 '합법적이고 적합함' 발표해  것을 요구하였다. 미국 국무원 역사자문사무실은 보그스 등이 서명한 양해각서를 제출하고 "미국은 관련 도서가 필리핀군도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밝혔다. 820 코델  미국 국무장관은  미국 육군장관에게 답신을 보내 "1898 협약에 따라 미국이 스페인으로부터 받은 필리핀 군도의 도서는 3조에서 규정하는 범위에 국한한다" 난사군도에 관해서는 "스페인이 이들 도서  어떤 곳에 대해서 주권을 행사하거나 주장을 했음을 나타내는 어떤 증거 없다" 하였다. 서한의 내용은 필리핀 영토에 남중국해 제도가 포함되지 않음을 증명하며 이는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64. 둘째, '카라얀군도' 필리핀이 발견한 '무주지'라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필리핀은  국민이 1956 '발견' 것을 근거로 중국의 난사군도의 일부 섬과 암초를 '카라얀군도' 명명하고 지명과 개념의 혼란을 초래하였으며 난사군도를 분리하려고 하였다. 사실 난사군도의